1,2,3


1.

다시 단발머리가 하고 싶어졌다.
20살 때 충동적으로 귀밑 3cm 단발로 잘라버린 후부터 7년이 넘도록 자르고 기르고 자르고 기르고 쇄골을 넘기지 못하는 어중간한 길이를 유지하고 있다. 요즘 매일같이 목도리를 휘휘 목에 감고 다니는데 그 안에 답답하게 껴있는 머리카락들이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목도리 위로 상큼하게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여자들을 보면 얼마나 가벼워보이는지.

소설 두근두근내인생에 나오는 것처럼 '단발을 하면 나쁜 점과 좋은 점'을 생각해보았다.

나쁜 점: 나는 머리손질을 매우 못한다, 그러므로 결국 질끈 묶고 다닐 것 같다, 얼굴이 더 동그래보일 수 있다,
심하게 짱구인 두상을 더 부각시킬수 있다. (어느 미용실 직원분이 에어리언급 두상이라고 표현했다. 그 미용실 안간다.)
옷도 중성적인 걸 넘어서서 남자같이 입는 편인데 머리까지 짧다면? 참 난 미용실 가는 것도 싫어한다. 

좋은 점: 머리 감는 시간이 단축되겠고 말리는 시간도 줄겠지. 분명 3일정도는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거다.
설마 머리를 자르면 어려보일까? 그건 모르겠다.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모르겠다. 좋은 점이 별로 없네.




2.

커피를 마시며 LL cool J 앨범을 신나게 듣고 있었다.
혼자서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로 흥겨운 음악인데도 그 리듬을 뚫고 옆테이블 아줌마들의 가열찬 수다가 귀에 꽃혔다. 
내가 듣는 이 음악의 비트와 아줌마들의 격한 표정과 쉴새없는 입모양이 묘하게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볼륨을 천천히 줄여가며 아줌마들의 대화에 남몰래 귀기울여 보았다. 

한 아줌마가 말하기를. 

"형님, 형님처럼 헌신하면 아무 대우 못 받아.
나처럼 얌통머리 없이 해야 남편한테 대우 받아.(음 얌통머리는 무엇일까. 얌체같이? 싸가지? 그런 느낌으로 해석해도 무방할듯)
해줄 건 요만치 해주고 받을 건 다 받고. 그래야돼 형님.
헌신하면 헌신짝 되는거야."

헌신하면 헌신짝된다니. 연애고수되는 법 특강에서나 들을 것 같은 엄청난 명언이다.

조언을 받는 상대방인 아줌마는 별 대꾸가 없으셨다. 몇초의 정적이 흐르고 아주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난 다시 이어폰을 끼고 좀전의 힙합은 꺼버리고 하림의 고해성사를 재생시켰다. 

나도 누군가의 헌신짝이었겠지. 재수없다.
어느 인간 관계에도 권력이 존재한다는 거. 진짜 괜히 뒤늦게 기분이 구리다. 아줌마 때문이야/




3.  

시간이 많으니 여기저기 관심이 가고 오지랖도 넓어지고 하고싶은 것도 많다.
그 시작은 우쿨렐레였지만 나에게 있는 유일한 음악적 재능은 노래방에서 잘 노는 것 뿐임을 깨달았다.
새롭게 생긴 취미는 밤마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일.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마구 칠하다 보면 거칠고 무르게 종이에 칠하는 느낌이 아주 좋다. 
노래를 틀어놓고 내가 고흐라도 된양 정열과 광기의 크레파스 터치를 휘두르게 된다.


 
  





 


남들이 다 느낀 걸 나만 못느꼈을 때/ 레미제라블



남들이 다 느낀 걸 나만 못느꼈을 때/ 레미제라블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나름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다.
처음 읽은 레미제라블은 읽는 내내 원통하고 답답한 억울한 기분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두번 정도 읽으니 답답하고 원통한 장발장의 삶 자체가 주는 메세지가 크다는 걸 알았다.
작은 아씨들, 폭풍의 언덕과 더불어 어린 시절 많이 좋아했던 책이었다.

아마 그때 읽은 레미제라블은 초등학생이 봐야할 고전명작 시리즈 같은 류의 책 얇은 책 한권이었을텐데
올해 도서관을 기웃대며 발견한 원작 고전 레미제라블은 무려 5권이 넘는 등장인물만 수십명인 대작이었다. 
그걸 빌려 읽어볼 엄두는 나지도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5권의 내용을 그렇게 무참하게 혹은 대담하게 한권으로 줄일 수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쓴 사람 또한 대단하지만 줄인 사람 또한 대단하다. 

아무튼 얼마전에 영화 레미제라블을 봤다.
뮤지컬을 안 좋아하고 뮤지컬영화 또한 잘 못참지만 명색의 레미제라블이고 주변 반응도 다들 좋았다. 
모두들 너무나 감동적이고 여운이 길다고 추천해주었다. '그래? 감동 하면 또 나지' 하며 극장에 갔다.

사실 나는 영화, 드라마, 음악, 책 그리고 동물농장은 물론이거니와 
인기가요 1위 수상소감, 연말 시상식 수상소감, 뉴스 인터뷰, 궁금한 이야기 Y 같은 것만 봐도  
코가 찡해지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이입의 아이콘이다.
  
옛 남자친구와 극장에서 데이트를 할때 영화에 흠뻑 빠져 눈물 범벅이 되어 나오는 나와 달리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며 건조한 얼굴로 나오는 남자친구에게 잠시 정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영화보고 눈물도 좀 흘리는 그런 남자를 좋아한다. 물론 오열은 좀 그렇겠지만.   
  
그런데 감정이입의 아이콘인 내가! 그 감동적인 대작 레미제라블을 보며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엄청난 런닝타임 내내 나는 몸을 베베 꼬았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걸까, 뮤지컬을 안 좋아하는 취향을 못이긴 걸까.
물론 어느 장면들에서 순간의 감동이 크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앤해서웨이 극중 판틴의 노래와 표정이 화면을 지내하면서 내내 고통스럽고 아팠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지금 들어도 i dreamed a dream 은 좋다. 그런데 글쎄, 그 장면을 빼고나면 순간의 감동이 오래가질 않고 아 길다. 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참 이상했다.  
스물여덟이 되어 영화로 본 레미제라블보다 학생 때 읽은 레미제라블이 훨씬 울림이 컸던 것 같다.

남들이 다 느낀 걸 나만 느끼지 못했을 때, 그 뻘쭘함.
극장을 나서면서 훌쩍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뻘쭘하게 서있다가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아주 오랜만에 그 뻘쭘함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감정이입하면서 살아온걸까. 



 



 


 



   

역도소녀


                             미끄럼틀에서 역도하는 소녀ㅡ크레파스**





 



 

(제목없음)


                                                        
마르고 닳도록 입던 자주색 니트의 소매가 고데기에 불탔다.
평소에 하지도 않는 고데기는 그 날따라 왜 켜놨는지.
뭔가 충격적이어서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니.
자주색 니트가 불에 타니 꼭 고구마의 속살마냥 노랗게 익은게 신기하다.
엄마는 곧바로 혀를 끌끌차며 내다버리라고 했지만 보다보니 나름 예쁜 거 같아서 오늘도 그냥 입고 나갔다.
카페에서 계산하는데 직원이 카드를 내미는 내 손 소매 쪽을 유난히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들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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